은사를 중심으로 한 예배 (Charismatic Worship)
은사 중심의 예배는 주로 15%(2012년 통계)에 해당하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순절파와 은사파를 오순절 계통으로 같이 취급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만 그 뿌리는 다릅니다.
1906년 캘리포니아 로스 앤젤레스의 다운타운Azusa Street에 있는 한 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희귀한 (지금은 그리 희귀한 것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듣도 보도 못한) 성령 체험을 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방언이 터졌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사도행전 2장에 묘사된 성령 강림이 재현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소문이 퍼져 나가 전국에서 성령체험과 방언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그 부흥회는 향후 몇 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성령체험을 한 사람들은 자기 고장으로 돌아가 새로운 교회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오순절파의 가장 큰 주장은 방언을 받아야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증거라고 주장했습니다. 한얼산 기도원 이천석 목사의 방언에 대한 에피소드는 거의 전설적입니다. 물론 1906년에 터진 방언이나 지금의 방언이 초기 교회에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터졌던 방언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는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에 비해 은사파는 1960년대에 오순절파 운동이 주류 교회에 들어가면서 성령 체험이 방언에만 그치지 않고 치유, 입신, 예언, 귀신 퇴치 등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로 넓혀진 운동입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1960년 고전적인 의전 예배를 드리던 캘리포니아 밴나이스 지역의 성공회 (Episcopal)의 신부가 성령 체험을 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몇몇 교인들도 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그 신부는 그 교회에서 쫓겨납니다. 그렇지만 그 신부 외에도 많은 주류 교회의 사역자들이 성령 체험을 하게 되고 그들이 따로 모여 성령 치유 집회 등을 하기 시작하면서 은사파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1967년에는 천주교 안에서도 은사파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뿌리는 다르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을 주장하는 데서 서로 비슷한 점이 많고 또 예배의 형식에 와서는 유사점이 많으므로 하나로 다루겠습니다.
은사파 운동은 예배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우선 방언으로 찬양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배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그 외에도 찬양 가운데 짧은 기도, 예를 들어 예수님 이름이나 “I love you, Lord.”등의 표현을 반복적으로 하게 됩니다. 손을 올리거나 무릎을 꿇는 등 다양한 표현이 자유스러워집니다. 예배 가운데 안수로 병고침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음악 면에서는 이 또한 1670년도 후반의 Jesus Movement의 영향을 받습니다. 지난번 CCM 예배를 다룰 때 지적했듯이 이 Jesus Movement는 CCM 예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은사를 중심으로 한 예배 또한 이 Jesus Movement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찬송가나 성가대를 과감히 버리고 CCM을 위주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어떤 학자는 은사라는 요소를 제외하면 은사 중심 예배는 CCM 예배와 별다를 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찬양 음악의 뿌리가 같은 Jesus Movement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CCM 예배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Calvary Chapel의 John Wimber 목사의 모델을 많이 닮고 있습니다. John Wimber는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도모하기 위한 예배를 위해 5 단계의 예배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1단계: 예배로의 부름 (A Call to Worship)
2단계: 만남 (Engagement) 역동적으로 하나님과 서로와 교감을 형성
3 단계: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 (Exaltation)
4 단계: 흠모 (Adoration) 2-3단계처럼 격동적이기보다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함.
5 단계: 친밀감 조성 (Intimacy) 성령의 임재를 체험
그러나 이런 모델에서 아주 중요하게 빠진 것이 있다고 비평가들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습니다. 성화의 과정이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모두 건너뛰고 승리의 삶 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 생활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또 하나의 유토피안 주일을 추구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어떤 비평가는 은사 예배를 보는 사람들은 주중에 어떻게 사는지 정말 궁금하다고 도전을 합니다. 주일 예배후에 그들도 목수일을 하고 병원에서 다친 사람을 꿰매고 머리를 쓰는 일을 하고 예술 작품을 만들고 아기들을 낳는 일에 은사 예배가 배어드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음악 면에서 같은 뿌리를 가진 CCM 예배 측에서도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CCM 예배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적보다는 성령의 감동으로 내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반면에 은사 예배는 내적인 변화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적을 추구한다는 비판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바란다면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님과 같이 걷는 그런 생활이 필요하다는 비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