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전쟁 12

개신교적 전통 예배 (계속)

찬송가의 대부분은 찬송시의 형식으로 가사가 먼저 쓰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곡조가 붙여집니다. 찬송시에는 신학적인 교리가 담겨있고 신앙의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따라서 음악을 바쳐 주기 위한 가사가 아니라 가사 그 자체에 생명이 있습니다. 1절을 거쳐 2절 3절을 지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교리가 전개됩니다. 그래서 찬송가는 절을 빼지 않고 노래해야 합니다. 몇 세기를 거치면서 찬송시 작가들은 신앙생활상의 모든 주제와 신학적인 주제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다루었습니다.

한글 찬송가는 한 음표에 한 글자가 적혀 있어 따라 하기가 쉽습니다. 영어 가사에도[1] 한 음표에 한 음절을 붙이는데 영어의 한 음절은 소리 나는 대로 적어보면 한 글자 이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의 후렴절은 영어로 “Lean-ing, lean-ing. Safe and se-cure from all a-larms”입니다. 이 중에서 Safe는 한 음표에 배정이 되어있는데 발음은 “세이프,” 3글자입니다. 그렇지만 한 음절이기 때문에 한 번에 발음합니다.

영어 찬송가에는 이 음절의 개념이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찬송시의 운율화(metricalization)에 있습니다. Metricalization이란 찬송시에 곡이 붙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암송하기 위해 운율화하는 작업입니다. 칼빈은 예배 시간에는 시편을 제외하고는 다른 음악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전 교인이 시편을 암송하기 위해 전 시편 150편을 운율화한 사실입니다. 나중에 찬송시가 나오기 시작하면서도 이 운율화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운율이 같으면 서로 곡을 바꿔가며 노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한글 찬송가는 한 글자가 한 음절이므로 그런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영어에는 그 운율화의 흔적이 아직도 찬송가에 남아있습니다. 필자가 갖고 있는 새찬송가에는 상단 오른쪽에 8.6.8.6 혹은 8.8.8.8등의 숫자가 적혀 있습니다. 이것이 운율 표시인데 운율이 같으면 곡을 바꿔서 노래를 해도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특히 영어 가사는 더욱 그렇습니다.

또한 필자의 새찬송가 뒤쪽에는 운율 색인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서로 곡을 바꿔도 상관이 없는 찬송가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새찬송가 280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와 353장 “십자가 군병 되어서”는 운율이 8.6.8.6.REF로 같습니다. 따라서 분위기가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곡을 바꿔서 불러도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순 국산 찬송가인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과 515장 “눈을 들어 하늘 보라”도 운율이 같습니다. 따라서 곡을 바꿔서 노래를 해도 전혀 무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찬송가는 곡이 붙기 전에 찬송시가 먼저 쓰였고 곡조는 다만 이 의미심장한 찬송시를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기기 위해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음악을 functional art라고 합니다. 음악 그 자체로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한 하나의 도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낭만파 음악이 시작되었을 때 교회에서 경계를 한 이유를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음악을 위한 음악이 지난 수 세기 동안 발전하다가 드디어 교회 안에도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한편에서 경계를 할 만도 합니다.

물론 전통예배는 찬송가만 있지 않습니다. 교독문이 있고 목회자 기도, 대표 기도, 성도들의 기도가 있습니다. 성경말씀도 lector라고 하는 훈련된 평신도가 읽든지 아니면 교인 전체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성가대가 있고, 헌금 시간이 따로 있으며 축도가 있습니다. 각 예배의 요소에 걸맞은 예배 음악이 개발되었습니다. 이렇듯 전통 예배는 한 예배 안에 교인 전체의 참여를 권장합니다. 주로 모든 예배의 순서가 성직자에 의해 행해졌던 천주교의 의식에 비해 개신교에서 시작된 이 예배 형식은 획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에서는 찬송가에 대해서 그리고 예배의 각 순서의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점점 형식화되어 갔고 굳어져 갔습니다. 교회에 찾아오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케케묵은 의미 없는 전통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필자는 희망을 갖습니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CCM 작가들이 교회 찬송가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찬송가에 담긴 뿌리 깊은 신학과 선배들의 믿음의 고백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찬송가를 현대 감각에 맞추어 편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찬송가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Phil Wickam이 Doxology (새찬송가 1장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새로운 감각으로 노래를 합니다. CCLI top 100에[2] 찬송가 풍의 10,000 Thousand Reasons, Revelation Song, Amazing Grace, How Great Thou Art, Agnus Dei, The wonderful cross등등이 올라와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새찬송가가 나오고 구찬송가가 지금의 예배 안에서 새로운 의미의 새찬송가가 되기를 희망해봅니다.

[1] 한글 찬송가의 대부분이 (통일 찬송가의 경우 90% 이상) 영어 찬송가에서 번역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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