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전쟁 7

예배학과 교회음악을 전공하는 신학생들 사이에는 이런 이야기가 오갑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 내려오는데 자기도 찬양을 담당하던 천사였기에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성가대 발코니에 내려와 떡 앉아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 음악을 둘러싸고 전쟁을 하게끔 한다고 합니다.

지난번까지는 성경상에 나타난 예배 전쟁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구약에서는 예배의 대상을 놓고 역사가 펼쳐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40년, 사사기, 왕정시대 내내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 왔다갔다 하며 예배 전쟁에 휩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참고 참으시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이스라엘을  벌하십니다. 그 벌로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와 바빌론에게 완전히 초토화되고 대거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포로로 잡혀간 후에야 이스라엘은 깨닫습니다. 시편 137편 말씀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시편 137:1-4 <개역개정>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로는 더 이상은 누구를 경배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초기 기독교를 지나 중세를 거치고 종교 개혁을 지나 오늘에까지 이릅니다.

앞으로 몇 가지 예배 형식을 소개할 텐데 각 예배 형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proof text)를 다름 아닌 성경에서 찾습니다. 자기들의 예배 형식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정해주신 예배라는 겁니다. 따라서 올바르게 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우선 Regulative Principle과 Normative Principle이 있습니다. Regulative Principle은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이 주장한 원리로 성경에 구체적으로 행하라고 쓰인 것만 예배에 허용된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와 반면에 Normative Principle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금하지 않은 것은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성도들이 판단하여 예배에 허용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칼빈의 Regulative Principle의 주장을 깊이 연구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편협한 주장은 아닙니다만 예배학 학자들 간에도 Regulative Principle을 편협하게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다음은 성경을 하나의 문학으로 볼 때 성경안에는 여러 장르가 있습니다. 시가 있고 노래가 있으며 역사가 있고 이야기가 있고 하나님의 명령, 비유 등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쓰인 그대로 읽고 해석한다는 말이 생각보다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시는 시로 읽고 해석해야 하며 비유는 비유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 나으니라 <마가복음 9:43>”라고 말씀하셨다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마가복음 9:45>”고 하셨다고 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성경에는 기술적 내용(Descriptive)이 있고 규범적 내용(Prescriptive)이 있습니다. 기술적 내용이란 그것을 지키라 말라의 말이 아니라 그냥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적어놓은 것을 말합니다. 그 가운데서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은 가능하지만 상당히 주관적 해석이 들어가므로 절대적이라고 주장하기엔 무리일 것입니다. 규범적 내용이란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 레위기, 신명기 등에 나타난 제사법, 예수님의 명령 등등이 이에 속합니다.

그다음은 대상입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이 유대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인가 아니면 크리스천에게도 적용되는가의 해석상의 문제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십일조를 둘러싼 논쟁입니다. 예수님이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23:23, 누가복음 11:42) 사도 바울도 십일조에 대해 말합니다 (히브리서 7:1-10).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유대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명령이 우리에게도 해당된다고 주장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명령은 유대인에게만 적용된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시대적인 상황입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이 그 당시의 시대에서만 해당되는 것인가 아니면 오늘날도 해당되는 것인가에 대한 논쟁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구약 시대의 일부 다처제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야곱이 그리고 다윗왕이 그랬습니다. 아내가 있고 첩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도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절대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달리 종족 보존과 번성이라는 그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 안에서의 분쟁 및 이단의 문제는 바로 이 해석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의 형식을 고집할 때 성경적인 이유를 대지만 우리에겐 또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다음부터 몇 가지 예배의 형식에 대해 다루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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