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는 덴마크의 19세기의 기독교 신학자이고 철학자였습니다. 그리고 실존주의 철학의 원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필자가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는 그저 그런 실존주의 철학자가 있었나 보다 하는 정도로 지나쳤는데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니면서 그분의 기독교적 실존주의가 기독교에 참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예배에 대해서 아주 흥미로운 분석을 했습니다. 예배를 연극에 비교했는데 연극과 마찬가지로 예배에도 세 개체가 있습니다. 관객이 있고, 배우가 있으며, 그리고 감독이 있습니다. 누가 관객이고, 누가 배우며, 누가 감독일까요? 예배에 참석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찬양팀이 있는 예배에서는 더더욱이. 찬양팀, 성가대, 설교하시는 목사님이 일단은 무대에 올라가 있으니까 배우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러 간 것이 아니라 예배를 보러 간 사람들이 관객석에 앉아있으니까 관객이겠지요. 그럼 누가 감독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아서 금방 알 수는 없지만 찬양팀이나 성가대는 알고 있습니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감동 있는 예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럼 혹시 성령님이 감독? 겉으로 드러나게 말은 안하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객은 오직 한 분 Audience of One 하나님밖에 없다고요. 그럼 우리가 생각했던 관객이 관객이 아니라면 예배당에 앉아있는 분들은? 키에르케고르가 다시 말합니다. 그분들이 배우라고.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무대에 올라간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감독? 맞습니다.[1] 오직 한 분이신 관객 하나님을 위해 찬양팀과 성가대 및 목사님은 배우인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감독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일리가 있는 말이죠? 어떤 목사님들은 예배를 연극 무대에 비교하는 것에 상당히 부담감을 갖고 계신데 그렇다 하더라도 키에르케고르의 비유는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우리는 교인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무대에서 쇼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때로는 예배를 인도하면서 차라리 교인들이 무대로 올라오고 찬양팀이 아래에서 인도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공상을 해봅니다. 실제로 청소년 예배 때에 한 번 그렇게 해 보기도 했습니다. 숫자가 적었으니까요. 그러나 어른들 보고 그렇게 하자고 했다면 아마 예배 디렉터로서 사표를 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매번 예배를 준비하면서 고민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배 디렉터로서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할 수 있을까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왕정시대 및 그의 최후
사무엘을 마지막으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 왕을 달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참 어이가 없어 하나님께 하소연할 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무엘, 너무 상심하지 마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거야. 그냥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 <사무엘상 8:6-9> 그렇게 씁쓸하게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못하십니다. 전적으로 나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사탄이 된 루시퍼를 대신해서 나에게 예배드리라고 사람을 창조하셨거늘 이들 마저도 나를 저버리는구나 하면서도 마지막 희망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라는 숨겨진 카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욥의 경우처럼 어쩌면 하나님은 사탄에게 내기를 걸었을지도 모릅니다. “너를 대신해서 내게 예배를 드릴 인간을 만들었으니 넌 이제 끝났어.” 그래서 사탄은 인간들을 질투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을 삼키려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8>
왕정시대에도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을 제외하고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앗시리아와 바빌론에게 망할 때까지 하나님과 이방신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어떤 왕 때는 하나님을 다른 왕 때는 바알을 섬깁니다. 성경은 크게 나눠서 악한 왕과 선한 왕으로 구별하는데 그 구별의 기준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느냐 아니면 이방신 바알을 섬기느냐 이것으로 선한 왕과 악한 왕을 구별합니다.
결국은 이방신을 섬기다가 북왕국 이스라엘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남왕국 유다는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셨던 그대로입니다. 사실 구약 성경의 역사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에스더를 마지막으로 역사는 끝나고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등 다섯 개의 시가문학이 있고 그 후에는 망해가는 북왕국과 남왕국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들의 글이 구약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렇게 혹독한 포로생활의 맛을 보고 나서야 이스라엘은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던 시절을 그리워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려는 노력도 있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새벽부터 정오까지 에스라 학사가 성경을 읽으매 모두 서서 경청해서 들었습니다. 너무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느헤미야 8:3-9> 그리고 하나님을 저버린 자신들의 죄를 회개합니다. <느헤미야 9> <계속>
[1] Liesch, Barry. The New Worship. Grand Rapids, MI: Baker Books, 2001. <p.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