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화합 15 – 유아 세례

지난번 글에서 침례교에 큰 영향을 주었던 아나뱁티스트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아나뱁티스트의 시작이었던 여러 명의 순교자들이 종교 개혁을 위해서 쯔윙글리와 자주 만나던 친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쯔윙글리는 나중에 배신자가 되었을까요? 처음에는 그도 유아세례를 반대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나뱁티스트들이 핍박을 받게 되자 자신이 종교 개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잃게 되고 그로 인해서 그가 그동안 추구하던 쮸리히에서의 종교 개혁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배신을 하게 됩니다.[1]

그러면 아나뱁티스트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반대했던 유아세례는 과연 성경적일까요?

유아세례에 찬성이던 반대이던 성경 학자들이 한 가지에는 동의합니다.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유아세례에 대한 언급(proof text)이 없다는 것입니다. 있었다면 이렇게 유아세례를 두고 피를 흘릴 이유가 없었겠지요. 성경에 proof text가 없으면 그다음 단계는 구체적인 구절은 아니더라도 유아세례에 대한 답을 유추할 수 있는 구절들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학자들은 신약에 언급된 침례는 모두 어른이었고 항상 입으로 믿음을 시인한 후에 침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유아는 스스로 믿음을 시인할 수 없으니까 침례를 받을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유아세례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침례는 할례의 연속이며 유대인 유아는 8일째에 믿음의 고백이 없이 할례를 받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침례는 “크리스찬의 할례”라고 골로새서 2장 11-12절에서 말했습니다. 결국 크리스찬 가정의 아이들은 언약 아래 있으므로 믿는 자의 집안사람이 침례를 받을 때 당연히 침례를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의 집안사람이 모두 침례를 받는 장면은 반대하는 학자들이 내세우는 성경 구절과 거의 같은 숫자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또한 만약에 유아세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유아세례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면 여자들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어야 할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성찬식에 참여했다는 말이 성경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시대가 지나고 교부 시대로 넘어오면서 교회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을까요? 1세기 끝 혹은 2세기 초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Didache나 2세기 중간에 쓰인 Justin Martyr의 First Apology에는 침례 과정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 글에는 침례 받을 사람들의 금식과 훈련과정, 결단, 회개 등등의 요구 사항이 쓰여 있으므로 믿는 자의 침례이고 유아에 대한 요구 사항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유아세례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이들 지침서는 나중에 개종한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이며 어려서 침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것이 유아세례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로만 볼 수는 없다는 주장입니다.

유아세례에 대한 구체적인 문서가 처음 나타난 때는 3세기 초입니다. Tertullian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예를 들어 죽어가는 신생아) 유아세례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권장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쓰인 것으로 추측되는 Hippolytus의 The Apostolic Tradition는 유아세례를 권장합니다. 3세기 중간 시기의 Origen은 “유아세례의 전통은 사도들에게서 전승 받은 것이다”라고 믿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의 교부들이 유아세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을 보면 이미 유아세례가 빈번히 행해지지 않았나 추측할 수 있습니다.

유아세례를 확실하게 정립한 신학은 성 어거스틴의 원죄설인데 어거스틴의 연구도 재미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비록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젊은 시절 방탕하게 살다가 나중에 크리스찬이 됩니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학자들은 어거스틴도 나중에 어른이 되어 침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어거스틴이 원죄설을 주장하면서 유아세례를 옹호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어거스틴은 유아세례를 예로 들면서 원죄설을 설명했습니다. 원죄설을 이유로 유아세례를 옹호한 것이 아니고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하는 이유는 원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벌써 4-5세기에 유아세례가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주장은 벌써 4-5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대부분의 어른들이 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어른들 중에는 침례를 받을 사람이 없고 이제 신생아에게 세례를 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재미있는 주장은 교회가 정치와 결탁을 하게 되면서 세금을 받아 내기 위한 방편으로 유아세례가 남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교통수단이나 통신수단이 전혀 발달이 안된 관계로 넓은 땅에 깊숙이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인두세를 걷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질병이나 영양실조로 많은 신생아들이 죽었는데 부모들의 입장에서는 죽어서도 그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한 방법이 유아세례였습니다. 영주들은 이런 사실을 이용하여 교회에 유아세례를 위해 오는 사람들에게 인두세를 징수했다는 역사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1] Leonard Verduin, Reformers and their Step Children (repr. Paris, AR: The Baptist Standard Bearer, Inc, 1964), 19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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