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화합 14 – 침례교회의 역사

세례인가 침례인가의 논쟁에는 침례교파의 영향력을 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침례교파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세례냐 침례냐의 논쟁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침례교의 역사를 간단하게 다루어 보겠습니다. 대체로 선교지역에 어떤 교단의 선교사들이 먼저 들어가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교파의 성향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장로교파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들어왔으므로 장로교파가 가장 큽니다. 2012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개신교 중 장로교가 28%로 가장 많고 침례교가 13% 그리고 감리교가 10%로 집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개신교 중에 침례교가 가장 큰 교파로 1/3이 침례교파입니다. 그런데 침례교의 역사가 재미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세 사람의 거장이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 장 칼빈, 그리고 율리치 쯔윙글리입니다. 이 중에서 쯔윙글리는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했는데 초기 당시에 같이 성경 공부를 하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경 공부를 하는 가운데 유아세례가 성경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유아세례를 받았던 사람도 거듭나려면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 그룹을 아나뱁티스트(Anabaptists)라고 불렀는데 당시에 “다시 침례를 주는 자”라는 뜻으로 이 사람들을 놀리는 목적으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얼마나 이 사람들의 믿는 바가 확고했던지 같이 공부하던 열 명쯤 되는 사람들은 모두 처형당하면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쯔윙글리는 이들과 같이 성경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침례식에 대해서 이들과 동의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이들의 주장을 반대하는 편에 서게 됩니다.

초기 아나뱁티스트들은 모두 목이 잘리거나 화형으로 죽었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나갔습니다. 물론 침례는 어느 정도 지각이 있는 다음에 받아야 한다는 “믿는 자의 침례주의(Believer’s baptism)”로 시작됐지만 나중에는 정교분리 즉 국가와 교회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 자유 의지, 병역의무 기피, 목회자는 교인들이 선택 및 개교회주의 등등의 독특한 주장이 더해졌습니다.

처음부터 중앙조직의 교단이라는 개념에 반대했던 이유로 통일된 조직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퍼져 나가지 못했지만 작은 그룹들이 점차적으로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1600년대에 아나뱁티스트와는 별개로 정교분리를 주장하던 교파가 시작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있은 지 약 10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영국 국교인 성공회가 로마 천주교와 결별을 하면서 자체내의 개혁을 시작하는데 그 개혁의 정도에 불만을 품었던 사람들이 영국 국교에서 탈퇴하면서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교파가 된 것입니다. 그 중의 한 목사가 침례교의 창시자라고 불리우는 존 스미스(John Smyth)입니다.

스미스 목사는 영국 국교의 핍박을 피해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그와 같이 망명을 한 몇몇 사람들과 교회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당시 유럽에 퍼져 있던 아나뱁티스트의 영향을 받아 믿는 자의 침례가 성경적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교회 역사가들은 이것이 침례교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 교인들에게 믿는 자의 침례식을 거행하려는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스미스 목사 자신은 영국 국교 출신이라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믿는 자의 침례를 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스미스 목사는 스스로 자기에게 침례식을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교인들에게 침례식을 거행하기 시작합니다.

스미스 목사는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글도 써서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믿음의 확신을 입으로 시인하고 침례를 받은 사람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글을 출판한 후 얼마 안 되어 스미스 목사는 그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스스로 행했던 침례식이 무효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메노나이트 교파에 몸을 담기로 하고 신청을 했는데 그 결과를 기다리다가 죽게 됩니다.

스미스 목사가 암스테르담 교회를 떠난 후 그 교회의 평신도였던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가 그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고 몇 년 후 헬위스 목사가 교인들과 함께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서 침례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믿는 자의 침례” 주의는 아나뱁티스트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다른 교단에서 이들을 아나뱁티스트라고 불렀을 때 이들은 강하게 이에 반발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나뱁티스트라는 이름은 이들을 놀리기 위해 사용했던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나뱁티스트는 처음부터 물에 잠기는 침례식을 했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습니다. 따라서 침례교파도 처음부터 침례식을 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한데 문서적으로는 1689년에 공표된 침례교파 교리에 이렇게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침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마땅히 침례 혹은 몸 전체가 물에 잠기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영국의 침례교파가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 침례교파를 이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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