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식에 관해서 천주교와 루터교 그리고 그 이외의 개신교가 아직도 열띤 논쟁을 벌이는 주제 중의 하나가 떡과 포도주의 실체에 대한 논쟁입니다.
사실 처음 9세기간은 떡과 포도주의 실체에 대해 그다지 큰 논쟁은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삼위일체, 예수님의 성육신, 창조의 선함 등 당시의 더 시급한 문제를 풀어나가고 대변하는 과정에서 성찬식이 설명되었습니다. 앰브로즈와 어거스틴 등의 교부들도 성찬식의 본질에 대해 열변을 토했지만 그들 역시 떡과 포도주의 실체보다는 성찬식에 참여함으로써 예수님과 하나됨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다가 9세기에 와서 떡과 포도주의 실체에 대한 문제가 대두됩니다. 성찬식에 대한 경외심이 점점 고조되는 가운데 두 신학자들이 첨예하게 대립을 하게 됩니다. 콜비의 라트람누스(Ratramnus of Corbi)는 예수님의 영적인 임재를 주장했고 파스카시어스 라드베르투스(Pascasius Radbertus)는 예수님의 육체적 임재를 주장했는데 결국 후자가 이기게 됩니다. 이제 떡과 포도주는 더 이상 평범한 떡과 포도주가 아니고 신부가 축사를 하는 그 순간 예수님의 실제 몸과 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실은 이것도 정확한 설명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육체적 임재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빌어 설명하려고 한 것인데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해해야 하는데 필자도 철학에는 문외한이므로 더 이상 깊이 설명할 수는 없고 다만 일반 사람들이 이렇게 받아들였다는 정도로 그치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찬식은 점점 더 성스러운 의식이 되어버리고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의식이 되었습니다. 점점 그 회수가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1년에 한두 번으로 끝나게 됩니다. 더군다나 포도주는 예수님의 거룩한 피가 되어 평신도에게는 아주 금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주장에 13세기에 정식 이름이 붙여지는데 그것이 화체설 (transubstantiation)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당시 성직자 중에는 성경은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성찬식의 예식을 배워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성직자들도 많았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성찬식의 남용이 문제가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의 선두자로 보통 세 사람을 꼽습니다. 루터, 칼빈, 그리고 쯔윙글리입니다. 그들의 두드러진 개혁도 개혁이지만 세 사람의 개혁의 방향이 아주 대조적이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천주교 안에서 개혁을 주장하다가 쫓겨나 어쩔 수 없이 개신교의 일원이 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천주교의 비리와 남용에 철저한 비판을 가했지만 많은 면에서 그는 천주교의 신학체계를 따랐습니다.
쯔윙글리는 인본주의자로서 기독교를 상당히 인본주의의 눈으로 보았고 따라서 그의 개혁 역시 인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칼빈은 많은 면에서 루터와 쯔윙글리의 중간 위치를 취합니다.
떡과 포도주의 실체에 대해서도 세 사람은 대조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루터는 물론 화체설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남용을 신랄히 비판했습니다. 성찬식에 관한 루터의 신학을 다루기에는 수십 권의 책으로도 부족하지만 요약을 하자면 신부가 축사를 하는 즉시 떡과 포도주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기존 천주교의 주장과 달리 루터는 떡과 포도주의 실체는 그대로 있지만 그 에센스가 예수님의 몸과 피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필자도 여기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루터의 주장에 맞서 천주교는 또 다시 화체설이 정설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그리고 루터의 주장은 성체공존설 (consubstantiation) 즉 떡과 포도주의 실체와 예수님의 몸과 피가 공존한다는 설로 명명됩니다.
쯔윙글리는 성찬식에서의 예수님의 임재는 단순히 상징적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당시 존재에는 몇 가지 모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중 성찬식에 관해서는 장소적 임재와 영적 임재로 설명을 합니다. 루터는 예수님의 몸의 장소적 임재가 신비하게 성찬식에 임한다고 믿은 반면 쯔윙글리는 예수님의 장소적 임재는 하늘나라에 있으며 재림 때까지는 세상에 장소적 임재는 있을 수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이 성찬식에 장소적 임재를 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칼빈은 루터와 쯔윙글리의 중간 입장을 취하게 되는데 어거스틴의 주장에 따라 성례를 신령한 것의 가시적 싸인(a visible sign of a sacred thing)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성찬식에도 떡과 포도주는 신령한 것의 가시적 싸인으로 해석을 하면서 루터의 장소적 임재 그리고 쯔윙글리의 상징적 임재 양쪽을 다 거부합니다.
과학과 이성의 시대 21세기에 각 교단의 입장은 어떨까요? 천주교는 아직도 화체설을 그리고 개신교는 성체공존설과 상징적 임재의 중간 어디쯤에 있습니다. 어쩌면 떡과 포도주 그리고 예수님의 몸과 피의 임재의 관계는 우리가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은) 신비에 쌓인 그런 것인지 모릅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지키라고 명하셨기에 지켜야 하는 중요한 의식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침례식과 더불어 성찬식을 서로 다른 교단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요한 의식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