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읽는 방법

성경에 진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인생의 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을 때 이를 올바르게 읽고 해석하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은 쓰여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하지 왜 해석을 하느냐고 반문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모두는 이미 우리의 경험과 지식 문화적인 배경 등등의 선입관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나름대로 해석을 합니다.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가이드가 없이 100사람에게 성경책을 주고 이 안에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내라고 한다면 100가지 다른 답이 나올 것입니다. 기독교의 초기 교부들은 새로이 생성된 기독교에 도전하는 수많은 이단들과 싸우면서 정통 (orthodox) 해석 방법을 정리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자칫 이단 사상이나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정통 해석 방법과 몇 가지 지침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서 계시하신 것만 (revelation)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데 여기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어떤 진리가 깨닫아질 때 그것이 성령님의 인도인지 아니면 내 나름대로의 생각인지 어떻게 분별(discern)하는 가 말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성령님이 깨달음을 주셨으니 이것이 진리이다라고 확정 짓는 것에는 위험요소가 많습니다.

이단의 특징중의 하나가 성령님을 들먹이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깨닫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같은 성경을 보면서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시면 자기네 식의 해석이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그 주장의 이면에는 자기네 식의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성령님의 감동을 못 받았다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들은 속으로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그에 대해 아니라는 증명을 댈 수 없으니까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어느 날 집 밖에서 야드 일을 하고 있는데 말끔하게 차려 입은 두 청년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가 섰습니다. 그리고는 이 두 청년이 필자에게 전도를 하는데 알고 보니 모르몬교였습니다. 필자도 평소에 모르몬교에 대해 관심이 있는 지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그들의 교리를 말하는데 필자가 수긍하지 않자 한 청년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성령님께 지금 의뢰를 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하는 말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 말 이면에는 이런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교리에 수긍하지 않으면 성령님이 당신의 마음속에 없는 것입니다.” 참 애매모호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단일수록 기독교인이라면 부인할 수 없는 그러나 또한 딱이나 증명할 수 없는 성령님의 역사를 자기네들 만이 전세를 낸 것처럼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필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믿는 성령님과 내가 믿는 성령님이 다른 분인가 보네요. 난 전혀 그런 감동이 없네요.

우리도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자가당착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검증이 필요합니다.

검증

성령님이 새로운 깨달음을 주셨다면 반드시 검증의 절차가 필요합니다. 지난 2천년간 수많은 종교지도자와 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해왔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엉뚱한 방향으로 나간 경우도 많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자칫하면 왜곡될 수 있는 기독교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분들도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면서 연구를 했을 터인데 우리가 뭐 그리 잘났다고 성령님이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않은 숨은 비밀을 우리에게만 보여 주시겠는가 말입니다. 한국의 수많은 이단들이 이런 부류입니다. 2천년동안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여주지 않던 성경의 진리 혹은 비밀을 성령님이 자기네들에게만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99.9999%는 2천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이미 다뤄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새로 깨달은 진리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검증의 절차는 정통 주석을 보거나 방대한 역사적 연구 자료를 볼 수 있겠지만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그래도 평신도에게 가장 쉬운 방법은 신뢰할 수 있는 목사님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물론 목사님도 자신의 전문 분야가 있으니까 모든 방면에 다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신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정통 해석 방법을 배운 분들이니까 최소한 방향 제시는 해 줄 수 있을 겁니다.

The Regulative Principle vs The Normative Principle

Regulative Principle과 Normative Principle이 있습니다. Regulative Principle은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이 주장한 원리로 성경에 구체적으로 행하라고 쓰인 것만 예배에 허용된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그와 반면에 Normative Principle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금하지 않은 것은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성도들이 판단하여 예배에 허용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칼빈의 Regulative Principle의 주장을 깊이 연구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편협한 주장은 아닙니다만 예배학 학자들 간에도 Regulative Principle을 편협하게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문학적인 장르

그 다음은 성경을 하나의 문학으로 볼 때 성경안에는 여러 장르가 있습니다. 시가 있고 노래가 있으며 역사가 있고 이야기가 있고 하나님의 명령, 비유 등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쓰인 그대로 읽고 해석한다는 말이 생각보다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시는 시로 읽고 해석해야 하며 비유는 비유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 나으니라 <마가복음 9:43>”라고 말씀하셨다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마가복음 9:45>”고 하셨다고 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당시에 사용했던 과장법 (hyperbole)이라는 문학적 표현 방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과장법이란 어떤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과장을 하는 문학적 기교를 말합니다. 예수님도 과장법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Descriptive vs Prescriptive

또한 성경에는 기술적 내용(Descriptive)이 있고 규범적 내용(Prescriptive)이 있습니다. 기술적 내용이란 그것을 지키라 말라의 말이 아니라 그냥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적어놓은 것을 말합니다. 그 가운데서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은 가능하지만 상당히 주관적 해석이 들어가므로 절대적이라고 주장하기엔 무리일 것입니다. 규범적 내용이란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 레위기, 신명기 등에 나타난 제사법, 예수님의 명령 등등이 이에 속합니다.

사사 시대에 전대미문의 큰 비극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입다가 팔레스타인과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 전쟁에서 나로 하여금 승리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제가 금의환향할 때 저의 집에서 나오는 첫 것을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입다로 하여금 승리하게끔 하셨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환호속에 집에 돌아오는데 하필이면 입다의 집에서 처음 나오는 사람이 입다의 결혼도 하지 않은 외동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손해가 되더라도 지켜야 한다는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입다는 슬픔을 머금고 서원을 지키기로 합니다. 그때 입다의 딸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청합니다. 2개월간 친구들과 슬퍼할 시간을 달라. 그 후에는 기꺼이 제물로 바쳐지겠다. 결국 2개월이 지나고 입다의 외동딸은 하나님께 번제물로 받쳐집니다.

이것을 prescriptive로 해석해야 할까요 아니면 descriptive로 해석해야 할까요?

당연히 descriptive로 해석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과의 서원을 절대로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상 (Audience)

그 다음은 대상입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이 유대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인가 아니면 크리스천에게도 적용되는가의 해석상의 문제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십일조를 둘러싼 논쟁입니다. 예수님이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23:23, 누가복음 11:42) 사도 바울도 십일조에 대해 말합니다 (히브리서 7:1-10).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유대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명령이 우리에게도 해당된다고 주장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명령은 유대인에게만 적용된다고 주장합니다.

또 안식일에 대한 논쟁도 여기에 속합니다. 완벽한 유대인이셨던 예수님도 모든 절기와 안식일을 지키셨고 역시 유대인이었던 사도들 그리고 초기 크리스천들도 유대교의 안식일을 지켰지만 과연 그것이 우리 이방인 크리스천에게도 지켜야 할 계명인가의 질문입니다.

시대적인 상황

또한 시대적인 상황이 있습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이 그 당시의 시대에서만 해당되는 것인가 아니면 오늘날도 해당되는 것인가에 대한 논쟁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구약 시대의 일부 다처제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야곱이 그리고 다윗왕이 그랬습니다. 아내가 여러 명 있었고 첩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에는 도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문화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달리 종족 보존과 번성 그리고 부족 간의 치열한 세력 다툼사이에 결혼이라는 제도를 도구로 사용해서 화친을 맺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 있었습니다.

신약에도 그런 예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 사도가 여자는 교회에서 조용히 하고 물을 것이 있으면 남편에게 물어보라는 말씀. 또는 여자는 교회에서 머리를 가려야 한다는 말씀. 성경을 쓰여진 그대로 읽어야 한다는 사람들은 이 말씀에 준하여 교회에서 여자들에게 리더쉽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에 주어진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자면 오늘 날 적용하기가 쉽지 않을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몇 가지 지침을 따르면서 성경을 깊이 묵상할 때 이미 밝혀진 것이 대부분이겠지만 나한테는 내가 모르던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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